처음에는 꽤 산만하게 시작한다. 각각의 챕터는 주연급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초반에는 이 인물과 더불어 그/그녀를 둘러싼 다른 조연급 등장인물들도 한꺼번에 우르르 나오기 때문이다. 줄잡아 수십명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니 당연 혼돈스러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생소한 호칭들이 아무런 부연설명없이 등장한다. 세르가 Sir를 의미한다는 것은 한참을 읽고나야 알 수 있다. 핸드라던가 킹스가드 ( 이름 참 유치하기도하지. 이것만 봐서는 좆중딩이 쓴 날라리 환협지로 밖에 안보인다. ) 등등도 마찬가지.
그러나 전개양상 자체는 꽤 차분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극도의 산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따라잡는게 크게 어렵지는 않다. 교통정리는 빠르게 진행되어나가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독자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빠른 것도 아니다. 물 아래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올라 결국 수면으로까지 번지는 이 모든 부글거리는 이야기들은 작가의 손에 이끌려 침착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차분하게 풀려나간다.
차분하다고해서 지루하다는걸 의미하는건 아니다. 차곡차곡 이야기들의 겹이 켜켜히 쌓아올려지는게 느껴지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재미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왕좌의 게임이 주는 재미는 물론 주전개인 플롯에서 나온다. 세븐킹덤의 왕좌를 둘러싼 복잡스러운 정치싸움들은 대한민국 인기드라마의 대표장르인 사극이 보여주는 교묘함과 교활함에 한치도 덜하지 않다. 고비마다 주어지는 적절한 반전들도 흥미롭다. 난 대너리스가 칼 드로고의 힘을 발판삼아 일사천리로 강대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더만. 그렇다고 이게 반전에만 기대는 줄거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에다드 스타크가 결국 왕비의 계략에 휘말릴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결국 그가 체포되는 장면에서는 눈알이 튀어나올만큼 긴장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소재를 중심으로하는 전개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 환타지 ' 임을 전제로하고 있지만, 사극스러운 궁정암투가 이야기의 중심에서 흐르는동안 독자는 이를 잠시 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멋진 타이밍에 멋지게 나타나 환타지로서의 정체성을 다시한번 뇌리에 각인시켜주는 ' 그 존재 ' 들의 등장에서 난 ' 오씨발 졸머쪄 오씨발 기절하게따 !! ' 를 연발했다.
한가지 더 흥미로운건, 왕좌의 게임에서 모든 캐릭터는 유기적으로 변화한다는거다. 대너리스는 처음에 오빠인 비세리스에 의해 정략결혼으로 팔려나가는, 오빠의 갖은 폭행과 협박에 그저 울고만 있는 겁많고 유약한 소녀로만 나온다. 그러나 어느순간 그녀 내부의 열정과 긍지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스스로 통제력을 잠식해나가는 것이 매우 설득력있게 그려지며, 종국에는 굴강한 인격을 지닌 단호한 여왕으로 재탄생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워서, 그저 그녀가 등장하는 씬만을 떼어내서 이어붙여도 멋진 소설이 되지않을까한다. 맑고 쾌활한 장난꾸러기이던 브랜이 점차 침울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나, 초반 정신나간 골칫거리 마누라 캐릭터라고 확신했던 캐틀린이 남편과 아들을 구하기위해 결의에 찬 굳건한 여인으로 변모하는 것도 멋진 광경이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지금 3부까지 나온 것 같던데. 일단 1부인 왕좌의 게임은 모두 읽었고 지금은 2부 왕들의 전쟁을 읽는 중이다. 책 띠지나 뒷면에 나오는 때로 유명한 사람들 때로 별로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추천사라던가 평가에 대해 난 대단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만, 이 소설의 뒷면에 실린 유명인들의 추천사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 이영도 : 얼음과 불의 노래는 재미있게 읽힌다. 이 책의 미국적 액션 및 속도감은 반지의 제왕의 영국적 유머 및 고색창연함과 분명히 구분된다. 하지만 이들은 판타지라는 만국 곡통의 코드를 공유하며, 그 코드를 공유해 보는 것은 한국 독자들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다. 21세기 초입에서 한국적 판타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 김민영 : 이야기 자체가 바로 마법인 진짜 마법을 톨킨 이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분좋은 감동이었다. 복잡하게, 그러나 정교하게 얽힌 이야기를 현란할 정도의 유연함으로 풀어가는 글솜씨에 가슴이 저밀 정도였다. 앞으로 이 책은 반지의 제왕의 뒤를 잇는 판타지의 고전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 진산 : 놀라운 것은 작가가 마치 ' 신 ' 처럼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냉혹할 정도로 공평하다는 것이다. 영리한 인물에게는 신체의 결함을, 숭고한 인물에게는 또 다른 부덕을, 심지어 꽤 호감을 얻는 인물에게마저도 과감한 죽음의 퇴장을 안겨주는 등 모든 인물을 장기 말처럼 다룬다. 말이라고 해서 평면적인 ' 도구 ' 로 전락했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각자 장기판 위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인간들이다.
지금 당장은 책을 읽는 중이라 최종적으로 평가내리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따진다면 얼음과 불의 노래는 일정 부분 이영도의 환타지를 능가하는 대목이 있으며, 반지의 제왕에 준하는 걸작으로 본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내 남은 소망이라면 작가가 부지런하고 오래살아서 부디 이 이야기를 완결지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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