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의 삼류 블로그

POST : 내좆대로 독후감

퍼언 연대기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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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왔다는건 알았는데 살까말까를 고민하다가, 서점을 배회하던 중 딱히 살만한 다른 책은 없고 일단 이건 번역자가 믿음직하니까 함 볼까? 하고 샀는데, 이거 대박이다. 우선 선량하고 착한 책값이 맘에 든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15000원이 안되는 가격으로 구입한다는건 현재 대한민국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북스피어는 이런 대담한 모험이자 파격적인 시도를 결단하고 실행했다. 넘흐 감사한 마음이 가슴 속에서 솟구쳐오른다. 지금까지 번역되어 나온 도킨스의 저작은 모두 구해 읽었음에도 아직까지 갓딜루젼을 사지 않은 결정적 이유가 책값에 대한 괘씸함 때문이라면, 퍼언 연대기를 펴낸 북스피어 관계자 여러분께는 제가 떡값이라도 좀 보내드려야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요. 대신 뭐 팬사이트같은거라도 하나 만들까. 나중에 직장 관두고 집에서 놀게되면 함 고민해봐야겠다. 지금 만들까하는 팬사이트만도 너무 많아서. ;;

그러나 물론, 단순히 두꺼운 책이 싸게 나왔다고 이렇게 광분하는건 아니다. 난 올 여름 미야베 미유키를 발견하고 ' 와~ 멋진 작가 하나 건졌네. 올해는 풍년이군 ' 했는데, 앤 맥카프리는 미유키에 비해 손색없는 멋진 작가다. 2007년은 캐풍년이군요. 이렇게 근사한 작가를 둘이나 건지다니. 뭐 다른 작품들은 전혀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서도 지금까지 읽은 퍼언 연대기 1,2,3권은 대만족. 소재는 분명히 환타지스러운데, 전개양식은 명백히 SF다. 이런 묘한 구조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면서 우왕ㅋ굳ㅋ한 수준으로 완성되고 있다.

1권은 말하자면 ' 퍼언 영웅탄생기 ' 정도로 요약되려나. 냉철하지만 의지가 강한 남자 플라르와, 확끈하고 까칠하지만 대단히 유능하고 명석한 레사라는 두 주인공이 커플을 이루어 용타고 다니며 퍼언이라는 행성을 헤집는 이야기다. 구조 자체는 다분히 전형적인 헐리웃 블럭버스터의 그것을 차용하고 있는데, 전개양상의 완성도가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말하자면 .. 헐리웃 블럭버스터들이 보여주는 패턴의 원형이자 완성형을 구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전체 시리즈의 첫편이니 이런 안정적인 구조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게 참 전략적으로 멋진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책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최초의 사포를 퇴치한 이후 레사의 활약은 실로 감탄스러운 것이, 이미 관련된 복선과 암시를 철저하게 다 깔아놨다가 그간 깔아놓은 그 모든 장치들을 빠짐없이 차곡차곡 꺼내어 사용하는 모습이 놀랍다.

2권은 전체 세 권중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다. 1권이 섭섭했던건 역시 ' 미워할만한 대상 ' 이 뚜렷하게 없기 때문이다. 사포는 말하자면 일종의 자연재해 같은거라서, 이 무생물에 가까운 무인격의 존재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인간들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놓고 미워하기가 애매한 감이 있다. 그러나 2권에선 구습과 구태에 안주하는 게으른 구시대인들이라는 명백한 적이 있는데다가, 신세대와 구세대간에 벌어지는 미묘하고 복잡한 갈등양상들이 흥미진진하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구시대인들의 캐릭터가 플라르+레사로 대표되는 현대인들에 비해 다분히 단조롭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랄까. 그저 미워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라는 것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두 그룹 간의 암투가 워낙이 치열하고 미묘하게 잘 묘사되고 있어서, 내용 전체가 1권에 손색없이 빠르게 읽는 이를 빨아들이는건 변함없다.

3권은 약간 모호한 느낌이다. 1권이 인간대 사포의 싸움, 2권이 인간대 인간의 싸움이라면 3권은 새시대를 열기위한 준비작업 - 이자 구시대를 재발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3권에서 강조되는건 그간 그 존재가 뚜렷하긴 했으나 명확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보긴 어려웠던 ' 드래곤 ' 자체이다. 변종 백색 드래곤과 그 기사가 다양한 모험들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사실 이 주인공의 성격이 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나름 색다르지만 널리 알려진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더한 매력이 있지는 않은 타입이랄까. 전체 줄거리가 깔아주는 그가 처한 환경이라는게 주인공에게 그런 캐릭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난 확끈한게 좋단 말이지 흐흐흐. 그러나 사회적으로 애매한 지위의 잭섬과, 선천적으로 변종인 그의 드래곤들의 이야기는 말하자면 ... ' 특수한 ' 존재들이 결코 ' 열등한 ' 존재가 아님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풀어가고 있어서 흡족스러운 부분도 있다. 플라르와 레사는 말하자면 전형적인 영웅 스타일인데, 잭섬과 루스는 상궤에서 벗어난 영웅이랄까. 영웅문의 양과랑 비스무레한 느낌이다. 반면 양과는 자신의 특수함과 사회 사이의 갈등을 격하게 풀어가는데 비해, 잭섬과 루스는 요령껏 잘도 비껴간다는 생각 ;;

까놓고 말해서 이 책은 앞서도 말했듯 특이한 소재를 SF스러운 방식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독특하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길다란 - 무려 2천페이지에 달하는 듯 한데 - 소설 전체가 재미있을 수는 없다. 쉴새없이 읽어내려가게 하는 원동력은 역시 작가의 놀라운 필력에서 나온다.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많은 나머지 약간 혼란스럽긴 하지만, 이 소설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진부한 캐릭터는 없다. 소설들을 많이 읽다보면 종종 부딪치는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캐릭터들을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작품들에서 찾게되는거다. 근데 내가 읽은 소설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적어도 퍼언 연대기에는 그런 ' 낯익은 ' 캐릭터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물론 겹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자기만의 성격이 있으며, 이는 꽤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음에도 서로 부딪치지 않고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며, 결정적으로 신선한 인물군들이 꽤 있다. 플라르는 일단 전면에 나서는 주인공이지만 3권에 오면 다소 까칠하게도 보인다. 근데 그게 원래 그의 캐릭터다. 레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데다가 종종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할만큼 성격이 강하고 짙은 여성 캐릭터인데, 이게 또 일반적인 이런 타입의 ' 강성 터프녀 ' 캐릭터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3권의 주인공은 처음에 영웅문 3부작의 마지막에 나오는 장무기랑 비슷한 우유부단한 타입이라고 여겼는데,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잘 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부분이 상당하다. 오히려 어른들 앞에서는 빙그시 웃으며 ' 신뢰받을만한 ' 인상을 심어주지만 결과적으로 일처리는 지멋대로 하는 타입이다. 어른들에게 신뢰받을만한 인상을 심어준다는건 영악한 냄새를 풍김으로써 결과적으로는 ' 똑똑한데 지멋대로인거 같아 ' 라는 이미지와는 또 다르다. 말 그대로의 모범생 분위기를 연출하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좀 아쉬운 부분이라면 ' 시간 패러독스 ' 를 지나치게 억지로 회피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시간 패러독스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 손쉬운 해결책이라고 할 때, 책 전체가 그 해결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구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딱히 ' 그런 패러독스를 저지르면 안되는 합리적인 이유 ' 같은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아울러 이건 2권에만 국한된 내용이긴 하지만 트컬과 트론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평면적인 악당이라 좀 아쉽기도 하고. 1권의 끝마무리엔 거의 영웅적인 인물로 나오던 이들이 왜 2권에서는 이렇게 바뀌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너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왕이면 이들의 사고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하나 넣어줬으면 좋았을 것을. 근데 사실, 읽다보면 사건전개가 워낙이 빈틈없고 완급조절을 잘 하는 덕에,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별로 없다. 순수한 독자로서가 아니라 까칠한 소비자로서의 의견이 이렇다는거지.

마일즈의 전쟁도 연대기인데 왜 달랑 한 권만 나오고 후속작이 번역되어 나오지 않는지 불만을 가진 나로서는, 달랑 한권이 먼저 나온게 아니라 3권이 동시에 이렇게 불쑥 나와준게 너무 고맙고 반갑고, 앞으로의 후속작에도 기대만땅. 가격대가 지금수준으로 유지되어준다면 더할나위없겠지만 사실 ... 이거 한번 읽어보면 다음엔 조금 비싸게 나와도 사줄 수 밖에 없지 싶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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