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필립 K. 딕을 떠올리면 일단 ( 애정을 담아 ) ' 그 정신병자 새끼 ' 라는 말 이 떠오르지만, 그는 명실상부하게 어린 양이었던 나를 SF의 깊은 늪으로 끌어들인 유혹적인 대가이다. 중학교 시절 휴일날 집에서 할 일이 없어 테레비전의 채널이나 드르륵드르륵 돌리던 내게, 거대한 눈깔이 클로즈업 된 장면은 언뜻 채널돌리기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뭔가가 펑~ 하고 터지면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씬. 이정도면 새파란 중딩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아무리 잘난척 그랜드슬램이 있다면 못해도 유력후보에는 오를거라고 자신하는 나라도, 중학생의 어린나이에 블레이드런너를 이해했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그런데도 나는 블레이드 런너를 처음 보았던 중딩시절 이후, 이 영화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다. 인터넷은 물론 케텔도 나우누리도 없던 그 시절에 무려 블레이드 런너라던가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는가 등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다양한 관문들이 있었고, 그 관문들 모두가 하나같이 나에게는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것이 내가 SF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이고.
아마도 태어나서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블레이드 런너가 아닌가 싶다. 무심한듯 쉬크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무뇌스러운 듯 우수어린 레이첼의 표정과, 인디아나 존스 또는 에어포스 원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믿기에 별 어려움 없는 젊은 시절 해리슨 포드의 발연기를 압도하는 룻거 하우거의 비장미. 무엇보다도 지금까지도 찬연히 빛나는 역사적 기념비라 할만한 경이의 디스토피아씬들은, 섹스랑 비슷한데가 있어. 보고 또 보다보면 지겨워진 듯 느끼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치 중독된 것처럼 찾고 또 찾게된다.
나중에 알게된 본격적으로 놀라운 사실은, 사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는가와 영화 블레이드 런너 사이엔 그저 약간의 소재를 제공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맞아떨어지는 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 내겐 나름 놀라운 반전이었던 것이, 블레이드 런너를 보고 또 보면서 상상했던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의 위광은 눈이 부셔 내 몸이 녹아버릴 듯 찬연히 빛나는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 내 영어실력으로 원서를 읽기는 부족함이 많았고 번역본이 소개된 것은 내가 영화를 접하고나서도 한참 후였기 때문이다. 읽어보곤 살짝, 어안이 벙벙했었다. 기대와는 너무 다른, 그러나 또다른 의미에서 굉장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접고,
필립 딕의 소설은 거의 대부분이 단편이며, 상당수가 ' 자아정체성 ' 을 소재로 이걸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쪼개보고 뜯어보고 찢어보고 밝혀본다. 그게 다다. 이렇게만 표현한 필립 딕의 소설들이 재미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사실이 그렇다. 재미없다. 아니 뭐 딱히 재미가 없다기보다는 뭐랄까 ... 읽다보면 낯익은 부분들이 여럿 나온다. 필립 딕이 말하는 자아정체성이란 주로 자신의 ' 과거의 기억 ' 으로부터 짜여져나오는 자기합리화의 일부일 뿐이라는 거다. 내 머리통이 기억을 자유자재로 썼다 지웠다 할 수 있는 메모리라고 칠 때, 나의 과거를 ' 얌전하고 소심한 신사형 인간 ' 으로 주입하면 나는 얌전하고 소심한 신사형 인간이 될 것이며, 나의 과거를 ' 터프하고 과격한 다혈질 인간 ' 으로 주입하면 나는 또 그런 인간이 될거라는 얘기. 간간히 빗나가는 부분들도 없잖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런 이야기다. 후대에 필립 딕의 이러한 결론을 반박하는 다크시티라는 또다른 걸작이 나오긴 했지만 사실, 그땐 이미 이런 문제는 유행이 지나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대가 되었던거죠 !!
기억에 집착하여 다양한 방향으로부터 이를 탐구했던 필립 딕의 작품들은 나의 조악한 글로는 이렇게 무식하게 요약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이런 문제에 너무 집착했었는지 필립 딕이 말년에는 정신병원에를 오락가락했더라는 ...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그 영향인지, 필립 딕의 작풍은 뭐랄까 좀 정신분열적인 데가 없잖다. 혹시나 이 작자의 책들을 연작으로 몰아서 읽을 계획을 가진 분이라면 약간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하고 싶다. 소설 ' 파프리카 ' 에서 벌어지는 것과 비슷한 일이 당신의 뇌리에서 벌어질 지도 모른다. 나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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